CCS 기행문
들어가며
세계 4대 보안 학회 중 하나인 ACM CCS가 2022년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었다.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온라인에서만 학회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프라인으로 CCS가 개최되는건 건 올해가 3년만이다. 이번에 나는 2년 동안 진행해온 TRACER 논문이 통과되어 발표자로써 CCS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허기홍 교수님과, 승완님, 태은님과 함께 LA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타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11/6 (Sun)
약 13시간 가량의 비행을 거쳐 미국 땅을 밟으니, 그제서야 출장을 온 것이 실감이 났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에 신기해하며, 버스와 우버를 타고 학회가 열리는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들어서자 우리가 잘 찾아왔다는 것을 알려주듯 CCS 장소를 알려주는 간판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날은 장시간의 비행으로 피곤한 상태였기에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한뒤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의미불명의 손동작
11/7 (Mon)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난 월요일 아침, 우리는 먼저 호텔에서 조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호텔 최상층에서 놀랄 만한 광경을 목격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아침식사 메뉴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시리얼을 편하게 먹을 수 있게 세팅되어 있던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미국 시리얼은 왠지 모르게 한국 시리얼보다 더 단맛이 나 자꾸자꾸 먹고 싶어지는 맛이었다.
매일 아침을 이렇게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후 호텔에만 계속 있기도 뭐해서 점심도 먹을 겸 근처를 돌아다녔다.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굴하지 않고 걷고 또 걸어 목적지였던 글로벌 센트럴 마켓에 도착했다. 마켓 안에는 피자, 햄버거, 일식, 중식 등 다양한 종류의 가게들이 음식을 팔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 점심을 먹을지 고민하다 결국 미국식 타코를 먹기로 했다. 나는 진열장에 먹음직스럽게 생긴 고기가 있어 뭔진 모른채 그걸로 주문했는데, 주문서를 보니 소의 혀라고 적혀있었다. 소의 혀는 대체 어떤 맛일지 궁금해하며 먹었더니 생각과는 다르게 굉장히 부드럽고 야들야들해서 맛있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우설 엔칠라다
저녁에는 그래도 미국까지 왔는데 스테이크를 한번 뜯어봐야 할 것 같아 근처에 있는 고급 스테이크 집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앉자 종업원이 친절하게 물을 가져다 주었는데 역시 비싼 식당이라 그런지 서비스가 좋다고 생각했다. 가격표를 본 순간 큰 충격을 받았는데 우선 스테이크 가격이 생각보다 더 비싸 충격이었고, 종업원이 방금 가져다 준 물이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또 한번 충격이었다. 하지만 고기를 입에 넣자 그런 사소한 일은 어찌되도 좋다고 느낄 정도의 행복감에 휩싸였다. 말로 다 표현하긴 힘들지만 기존에 먹었던 스테이크들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스테이크를 먹는 느낌이었다. 비록 100달러를 쓰긴 했지만 교수님과 연구실 동료들도 맛에 대해서는 이견없이 인정했기 때문에, 근처에 가게 된다면 한번쯤 먹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드셔보신 분들의 칭찬세례!
11/8 (Tue)
화요일부터는 본격적인 학회가 시작되는 날이라 그런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첫 주요 발표는 굉장히 큰 방에서 진행되었는데, 혹시 나도 이런 데서 발표를 하는건가라고 생각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발표가 끝난 직후에는 그 층이 인산인해로 붐벼 지나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수많은 인파로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기분 전환 겸 LA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아직 발표를 할때 버벅이는 부분이 있었기에, 준비를 좀 더 완벽히 해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본이야 시간을 투자해서 어떻게든 외우면 되는 일이지만, 진짜 걱정이 되는 부분은 질의응답이었다. 나는 영어 듣기에 약해서, 영어로 대화를 하면 50% 정도의 확률로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무리 발표를 잘해도 질의응답을 이상하게 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 연구를 제대로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부분이 조금 걱정되었다.
11/9 (Wed)
아무튼 그렇게 시간은 흘러 눈 깜짝할 사이 발표 당일이 되었다. 내 발표시간은 오후 3시 반이었는데, 시차적응이 안돼 잠을 설친데다 긴장감까지 더해져 오전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발표장에 앉아서 내 바로 직전 발표를 듣는 15분이 대학원 입학이래 가장 긴장된 순간이었던 것 같다. 발표가 끝나자 세션 체어 분이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앞으로 나갔다. 발표를 시작하고 말을 좀 했더니 다행히도 뇌가 약간 활성화되는 듯했고, 나는 머릿속으로 대본에 집중하면서도 관객들의 얼굴을 한명한명 살펴볼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오른쪽 앞에 앉아 계시던 분이 내가 말할때마다 리액션을 크게 해주셔서,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발표는 꽤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이제 속으로 아무도 질문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TRACER는 질문할 거리가 꽤 많은 연구라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이전 발표에서는 질문자가 0명이었는데, 내 앞으로는 이미 3명의 질문자가 대기중이었다. 나는 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질문자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는 것에 집중했고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답변을 이어나갔다. 길었던 5분간의 질의응답이 끝나고, 나는 내심 나쁘지 않게 해냈다는 생각에 안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 돌아와서 교수님이 내가 질문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고 알려주셨고,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한국어로 했다면 완벽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 질문을, 미흡하게 대답한 것이 아쉬웠고 질문자분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화난 거 아닙니다
발표가 끝난 후에는 학회 측에서 제공하는 저녁 연회에 참석했다. 세계 4대 보안 학회는 대체 어느 정도의 음식을 줄지 기대했는데, 이상하게 생긴 식물 덩어리와 초코파이를 주는 것을 보고 역시 최고 수준의 학회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연회 도중에 Best Paper를 비롯한 각종 상에 대한 시상이 있었는데, 10년 전 발표된 논문 중 보안 분야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여기지는 눈문들에 주는 상인 Test-of-Time Award가 가장 인상깊었다.
초코파이를 먹을 생각에 신난 사람들
11/10 (Thu)
목요일은 발표가 끝나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꽤나 늦은 시간까지 숙면을 취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계는 이미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발표 연습을 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발표를 거의 듣지 못해서, 오늘 좀 들어두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그렇게 글로벌 센트럴 마켓에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칵테일을 마시는 것으로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은 끝이 났다.
11/11 (Fri)
금요일 아침, 우리는 짐을 챙겨 호텔을 떠나 USC로 향했다. 거기서 교수님이 포닥시절 함께 일했던 Mukund 교수님과 만나뵙고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오전에는 Mukund 교수님을 포함해 총 4분의 교수님과 미팅을 했는데, 모든 교수님들이 정말 친절하시고 우리 연구에 대해 좋은 피드백을 많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 후, 점심시간에는 여러 연구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수님의 TRACER 발표를 들었다. USC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발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고, 날카로운 질문들을 많이 해주셔서 나 역시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교수님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Mukund 교수님
USC에서 교수님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던 것도 정말 좋은 경험이었지만, 또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학교의 풍경이었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예쁜 건물들이 여기저기 있어 학교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 또 우리가 찾아간 날이 풋볼 대회가 있던 날이라 저녁이 되자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웃고 떠들며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그 모습이 마치 하이틴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나 역시도 한 명의 엑스트라로써 거기에 참여한 기분이었다.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시계탑
그렇게 USC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드디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기행문을 쓰는 지금에서는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비행기에 탑승한 나는 출발할 때에 비해서는 조금 더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마치며
이렇게 나의 첫 해외 학회 출장이 무사히 종료되었다. 발표를 생각보다 잘 해내서 다행이었지만, 질의응답이나 외국인들과의 대화가 원활히 되지 못했던 부분은 아쉬웠다. 영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서, 다음번에 해외 학회를 다시 가게 된다면 좀 더 나아진 모습으로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프라인 학회를 참석해보니 확실히 온라인으로 참가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하는 각국의 많은 사람들, Best Paper를 수상하며 기뻐하는 연구자 분들의 모습, 라이벌이 아닌 동료로써 서로 토론하고 도움을 주는 커뮤니티. 이런 것들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뭉클해졌고, 앞으로 내가 나아길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진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허기홍 교수님과, 그 밖에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기행문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