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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뉴욕 타임즈에 실린 David Brooks의 A Surprising Route to the Best Life Possible를 번역한 것이다.

교육자의 사명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일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6월의 중턱에서, 이번 학기에는 불쏘시개 역할을 얼마나 했나 돌아보던 참에 우연히 이 글을 마주쳤다. 한 때 대학생들의 열기로 끓던 뚝배기였다가, 이제는 3-40대 졸업생들의 미적지근한 보온밥솥이 된 모교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였다. 어떤 이가 뉴욕 타임즈에 실린 이 글을 공유했고, 댓글로 누군가가 학부 때 들은 과학 철학 수업의 주제와 같다는 평을 했다. 댓글에 달려있는 교수님의 성함과 과목명이 익숙했다. 아직도 가끔 떠오르는, 대학교 4학년 나에게 큰 깨달음을 준 과학 철학 수업. 덕분에 내가 문제 풀이용 깡통 기계가 아니라, 그나마 최소한 과학이란게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하는 과학자가 될 수 있게한 수업이었다. 그 댓글 뒤부터는 동창회가 열렸다. 교수님이 들려준 이야기, 그때 읽은 책의 한 구절, 심지어 기말고사 마지막 문제까지 함께 복기해냈다. 종강한지 10-20년 넘은 수강생들의 가슴에 다시금 불씨를 지피다니, 단연 명강의라 할만하다.

짧지 않은 이 글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고 싶어서 번역을 해보기로 했다. “지식”도 그렇긴 하지만, 특히 “지혜”를 뼈에 아로새길 때는 모국어의 효율을 따라갈 수 없다. (배운것을 머리가 아니라 뼈에 새겨야 한다는 말도 그 교수님께 들은 말이다.) 우리말로 써놓으면 틈틈이 꺼내보기도 좋을 것이고,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교수님도 시중에 나와있는 과학 철학 책의 번역이 좋지 않다며 직접 번역한 자료를 수업시간에 나누어주시곤 했다.) 해당 게시글에 제법 훌륭한 번역본이 함께 있긴 했지만, 군데군데 내 방식대로 읽고 전달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ChatGPT를 이용하니 평이한 부분은 술술 넘기고, 내 식대로 강조하고 싶은 곳만 궁리하고 몰두할 수 있었다. AI와 함께 책을 깊이 읽어 내는 괜찮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이 글을 번역 해볼까?”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것, 영어로 쓰여진 원문을 말 맛이 살아있게 모국어로 잘 쓰고 싶은 열망, 바라는 결과물의 수준과 내 실력의 간극, 이 글에 온전히 몰두한 오늘, 모두 이 글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 글의 의미가 다시 이 글 자체에 적용되다니, 상당히 재귀적인 과정이라 할만하다.

들을 때마다 설레고 계속 듣고 싶은 노래가 있듯이, 읽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다시 찾고 싶은 글이 있다. 이 글이 그랬다. 많은 분들이 비슷한 벅차오름에 다다르는데 징검다리가 될 번역이기를 바란다. 아래는 원문을 읽고 옮기며 생각난 몇 가지 개인적인 소감이다.

  • AI는 전문 번역가의 일자리를 뺏는게 아니라, 가치를 더 빛나게 할 것이라고 본다. AI가 번역한 글은 나같은 아마추어가 보아도 고칠데 투성이다. 평범한 문장은 AI에게 맡기고, 그 시간동안 전문 번역가들이 화룡점정에 더 깊이 골몰한다면, 번역의 품질은 앞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발전하리라 본다. 더군다나 번역은 재창조라고 하는데, 앞으로는 저마다 독특한 말 맛으로 원문을 살리는 번역가가 더 많아지고, 대중의 사랑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리메이크 앨범으로 사랑받는 가수처럼.

  • 이 글의 후반부를 읽다보니 최근 읽은 『나쁜 교육』에서 이야기한 내용이 떠오른다. 우리의 삶이 모닥불이라면, 이 불을 오래동안 꺼트리지 않는 방법은 바람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세찬 바람을 일으켜 큰 산불로 키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교육은 그 세찬 바람을 일으키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

  • 소박한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소신껏 끊임없이 몰두하는 행복은 리처드 해밍의 유명한 강연 “당신과 당신의 연구“의 내용과도 맞닿아 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것도 내게 과학을 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신 대학원 스승님의 번역 덕분이었다. 그 울림에 내가 공명했듯, 내 울림도 누군가에게 전달되길.


무라카미 하루키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훗날 큰 성취를 이루는 많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선생님이 하라고 하는 것에는 도통 집중을 못 했다. 대신 오직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래도 결국 대학에는 입학을 했다. 그러다가 졸업을 몇 학점 남겨둔 시점, 도쿄에 작은 재즈 클럽을 열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겨우 가게 운영비를 감당하고 직원을 고용하며 클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978년, 무라카미는 일본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응원하던 야쿠르트 스왈로스 팀의 선두 타자가 좌익선상으로 공을 쳐내며 2루까지 진루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무라카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니 근데, 나도 소설을 한 번 써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무라카미는 클럽 영업이 끝난 뒤 글을 쓰기 시작했고, 결국 원고를 한 문학잡지사에 보냈다.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냐면, 잡지사가 원고를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 복사본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원고는 상을 받았고, 다음 해 여름에 출판되었다. 그러자 무라카미는 유일한 안정적인 수입원이던 바를 팔고 글쓰기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2008년에 나온 무라카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뭔가를 할 때는 완전히 몰두해야 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재즈 클럽 운영을 그만둔 뒤 체력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무라카미는 바로 체중이 늘기 시작했다. 그러니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집 근처에 트랙이 있었다. 특별한 장비도 필요 없으며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달리기가 괜찮아 보였다.

무라카미는 ‘완전히 몰두’할 때 거침이 없었다. 2000년대 후반에 그는 일주일에 여섯 번, 하루 6마일(9.6km)씩 매일 달렸고, 마라톤 대회만 23번 참가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장거리 달리기, 울트라마라톤, 철인3종 경기까지 섭렵했다.

그가 젊었을 때도 기록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뛰는 시간 대부분을 고통스러워 했다. 그의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에는 경기마다 겪는 고통을 묘사하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이번에 달리면서, 다시는 뛰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느꼈다.” 혹은 “23마일쯤 달렸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또는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상하게도 성취감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오직 느껴지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된다는 완전한 안도감뿐이었다.” 혹은 “육체적으로 탈진할 정도였고, 이후 한동안은 다시는 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을 일부러 계속했을까?’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그렇게 고된 일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남극을 횡단하고, 대서양을 노 저어 건너는 모험광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 물론 그런 일들은 정말 고통스럽게 들리긴 한다. 내가 말하는 건 우리처럼 평범하게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주위를 보면 이런 사람들이 많다. 지루함을 견뎌내며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들, 스케이트보드를 배우다 수없이 계단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람들, 과학 문제 하나를 풀기 위해 고된 정신노동을 반복하는 사람들, 남을 관리하는 일을 기꺼이 맡는 사람들(이건 정말 힘들다), 그리고 창업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이것도 미친듯이 어렵다).

내가 택한 고통은 ‘글쓰기’다. 물론 지금은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기 때문에 외적 보상을 받고 있긴 하다. 하지만 돈과는 상관없이 예전부터 써왔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 사실 돈은 동기부여로 그리 충분하지 않다.

나는 매일 아침, 일주일 내내 사무실로 터벅터벅 걸어가 1,200자를 써낸다 — 40년 넘게 반복해온 일과다. 나는 글쓰기를 즐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은 힘들고 불안하다. 글 한 편의 구조를 어떻게 짤지 결정하는 일만 해도 엄청 어렵고, 경험이 쌓여도 전혀 쉬워지지 않는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글을 쓰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 사무실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건 그냥 내가 하는 일이다. 그 일상이 삶에 구조와 의미를 부여한다. 즐기지는 않지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쾌락주의나 공리주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은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며, 비용은 적고 보상은 큰 활동을 선택하려 한다. 노력은 힘들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그 노력을 줄이려 한다. 때로는 깊이 생각하는 노력조차도.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 그런 논리에 따라 행동한다. 단,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진심으로 아끼는 것들 — 직업, 가족, 정체성, 혹은 삶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 — 을 대할 때는, 전혀 다른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은 바로 열정적인 욕망과 종종 고통을 수반하는 노력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렇다. 마음이 현실적인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가성비를 따진다. 하지만 위대한 일은 그런 계산적인 마음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위대한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힘든 도전을 견디는 건, 뭔가에 매혹되고, 사로잡히고,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이나 활동이 그들을 붙잡고, 마음 깊숙이 갈고리를 걸고, 가능성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불태운 것이다.

그 매혹적인 순간은 아주 미묘하고 평범할 수도 있다. 야구 선수가 2루타를 치는 장면을 보고 무라카미가 소설을 써볼까 생각한 것처럼. 또는 집 근처에 달릴 수 있는 트랙이 있으니 뛰어볼까 하는 마음처럼. 하지만 그런 순간에, 어떤 활동이나 이상에 대한 몰입이 자기도 모르게, 순식간에 시작된다. 조용한 열정이 이렇게 불붙는다. 고된 여정이 이제 시작된다.

그렇게 무언가에 ‘사로잡힐 수 있는 능력’은 위대하지만 종종 과소평가되는 재능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것에 둔감하게 살아간다. 학교나 직장에서 실용적이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사고방식을 몸에 익혀버렸다. 항상 압박 속에서 살다 보니 고개를 숙이고 살아가고, 기쁨에 마음을 열지 않고, 삶을 바꾸는 황홀한 순간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어떤 이들은 그런 매혹에 활짝 열려 있다.

그들은 자기 안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줄 안다. “나도 소설을 써볼 수 있을것 같은데?” 그들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쉽게 영향을 받고, 열정적이며, 흡수력이 좋고,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다. 놀라움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들이며, 그런 생산적인 혼란이 닥쳤을 때 멈춰 서서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지금 무슨 부름을 받고 있는 걸까?” 우리의 위대한 여정 대부분은 놀라움에서 시작된다. 데카르트는 경이로움을 “영혼이 갑작스레 놀라는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은 어떤 것들일까? 어떤 사람들은 멋진 사람들,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 무리에 우연히 휩쓸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모스 하트는 브롱크스에서 공상에 잠겨 지내던 불우한 소년이었다. 어느 날 그는 지하철을 타고 브로드웨이로 나갔다. 거기서 연극인들이 자신의 꿈을 무대에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느꼈다. 그 날 한 극작가가 탄생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만나며 소명을 발견한다. 우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미래의 천문학자, 매끄럽게 돌아가는 엔진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미래의 정비사처럼. 예후디 메뉴인은 세 살 때 바이올리니스트 루이 페르징거의 연주회를 보았고, 네 번째 생일 선물로 바이올린을 달라고 부모에게 졸랐다. 그는 수십 년 후 이렇게 회고했다. “연주한다는 것은 곧 존재한다는 것임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과학자의 길 역시 작고 사소한 관찰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거참 이상하네.” 아인슈타인은 네 살 때, 나침반 바늘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보이지 않는 힘이 평생 연구 주제가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압도당하는 진실을 느끼며 공직으로 들어선다.

토니 와그너는 22살 때, 간디의 제자에게 “혁명이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 그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혁명이란 개인의 덕을 사회적 가치로 바꾸는 역동적 과정입니다.” 와그너는 즉시 깨달았다. 자신은 그 과정에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이후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이 모든 경우에 공통되는 것은 바로 ‘불붙는 순간’이다. 외부의 어떤 것이 내면 깊은 곳을 건드리고, 그로 인해 새로운 개인적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수태고지가 일어난 순간(annunciation moments)”이라 부르고 싶다. 어떤 부름을 받는 순간, 이후 삶의 전개를 미리 암시하는 순간들이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이렇게 물었다. “너의 자아는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그리고 대답했다. “항상, 네가 경험한 가장 깊은 매혹 속에서.”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졸업 연설에서 흔히 나오는 상투적인 말들로 포장한다. “열정을 따라라”, “마음을 따라라.” 하지만 그런 말들은 너무 모호해서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 나는 더 제대로 알고 싶다. 누군가가 어떤 지배적인 욕망에 사로잡힐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어떻게 그 뜨거운 헌신이 자라나 삶을 집어삼키고, 사람을 자발적인 고통 속으로 이끌게 되는지.

그 과정은 신비로움에서 시작된다.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이 불붙는 순간은 우리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에서 일어난다. 관심이 피어나고, 욕망이 형성되며, 동기라는 존재의 핵이 작동하는 그 어둡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말이다. 나조차도 그 부분을 쉽게 들여다볼 수 없다. 왜 나는 지질학이 아니라 천문학에 관심이 있는 걸까? 모르겠다. 왜 렘브란트에게는 매혹되고, 엘 그레코에게는 아무 감흥도 없는 걸까? 모르겠다. 왜 나는 그 여자를 사랑하고, 다른 여자는 사랑하지 않는 걸까? 나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메뉴판에서 무엇을 고를지는 정할 수 있지만, 무엇을 좋아할지는 정할 수 없다.

사랑에 빠지는 다른 모든 경우처럼, 이 점화는 마음 속 야성에서 일어난다. 미묘한 예감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곧 놀라운 에너지를 일으킨다. 그리고 다른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는 숭고한 비이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도시, 활동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이성적인 계산의 결과가 아니다. 더 크고, 더 어둡고, 더 열정적인 어떤 힘이 우리 안에 불꽃을 튀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비추고, 사로잡고, 복종하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바로 호기심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어진다. 호기심은 마음의 에로스, 추진력이다. 때로는 어린아이 같아 보인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이 호기심이라는 감정에 대해 늘 불안해해 왔다. 어디로 이끌려 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한 등장인물은 호기심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불복종”이라 불렀다. 호기심은 당신을 그 어두운 동굴로 이끈다. 무섭고도 위험해 보이는 그곳으로. 호기심은 당신이 안주하던 편안한 장소를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당신을 끌고 간다.

무라카미는 자신의 소설 『1Q84』에서 이런 성가신 호기심을 이렇게 묘사한다. “지도를 보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봐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장소가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그 장소는 이상하게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가기 힘든 곳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론물리학이 너무나 고된 작업이라, 오직 열정적인 호기심이 있어야만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자의 ‘종교적 감정’이란 “자연 법칙의 조화로움에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경이로움은 인간 정신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체험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음악과 시가 주는 최고의 미적 열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다른 열정과 마찬가지로, 호기심도 본능에서 출발해 체계적인 기술로 발전되어야 한다. 좋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훈련하는 법을 가르친다. 효과적인 호기심을 지닌 사람들은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인지적 열정(미지를 탐구하고 새로운 생각을 즐기는 태도), 인지적 자신감(어려운 문제에 도전할 용기), 인지적 복잡성(단순한 고정관념에 안주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열정적인 삶의 다음 단계는 ‘간극’이다. 탐구자는 자신이 어떤 주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싶어 하는 것 사이, 또는 자신이 어떤 활동을 잘하는 수준과 잘하고 싶은 수준 사이에 큰 간극이 있음을 스스로 안다. 그것이 발레든, 공학이든, 육아든 간에, 탐구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높은 이상을 품을 만큼 영감을 받으며,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지니고 있다.

‘열망’은 이런 간극을 느끼는 데서 비롯된다.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인간에게는 최소 네 가지 기본 심리 욕구가 있다: 자율성, 소속감, 유능감, 의미. 이 중에서도 유능감을 추구하는 것은 보통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다. 어떤 활동이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더 잘하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를 느낀다. 이중줄넘기를 배우는 아이들, 차고 앞마당에서 농구공을 던지는 나, 팬케이크를 점점 더 잘 뒤집게 된 걸 자랑스러워하는 누군가, 모두가 그렇다. 발전을 추구할 때 우리는 자신의 능력 끝자락, 삶의 벼랑 끝에 서게 되고, 그런 한걸음 한걸음마다 뼛속 깊은 곳에서 짜릿함이 따라온다.

그리고는 마침내 ‘첫 정복감’을 맛보게 된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쓴 작가 아론 소킨은 마크 저커버그가 왜 페이스북을 만들었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작가는 실연의 아픔이 동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하지만 저커버그 본인은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내놓았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것이다. 그냥 만드는 걸 좋아해서 뭔가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개발자들이 밤새 코드를 짜는 이유는, 그저 코딩을 좋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코딩이든, 요리든, 정원이든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뛰어나고 싶어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무언가를 만들고, 어떤 것에 능숙해지고자 하는 바로 이 욕망인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잡지 기사를 시로 번역한 뒤 다시 산문으로 되돌리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연마했다. 빌 브래들리는 농구공을 드리블하는 감각을 시력보다 직관에 더 의존하도록 훈련하기 위해 안경 밑에 종이판을 붙이고 연습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죽음의 침상에서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일부를 고쳐 썼다. 극심한 고통 속에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더 낫게, 더 제대로 만들고 싶어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솜씨에 몰입해 있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일종의 ‘존(zone) 2’의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이는 운동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그들은 조급해하지 않고 꾸준히 갈고 닦는다. 에너지를 불태우다 지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자신의 고랑을 하루하루 조금씩 더 깊이 파고 들어간다.

이들은 수세적인 태도가 아닌, 공세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 실패를 두려워 하기 보다는, 무언가에 강하게 이끌리는 열정에 따라 움직인다. 장애물을 위협이 아니라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기분 좋은 날에는 자신에게 딱 맞는 난이도로 과제를 부여한다. 행복은 대부분 원하는 것을 얻는 데서 오거나 편안하게 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겨우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살아가는 데서 온다.

장인의 경지에 이르면, 사람은 결과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사랑하게 된다. 그 작은 규율들, 긴 시간, 끝없이 이어지는 반복적인 노동까지도. 당신이 록스타가 되고 싶다 해도, 음악을 만드는 고된 과정과 공연 투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장인은 자기 분야 지식을 충분히 내면화했기에 직관적으로 일할 수 있다. 규칙보다는 감각에 의존하며, 축적된 동작의 레퍼토리를 자유롭게 꺼내 쓴다. 시인 W.H. 오든은 이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누군가가 진정 자신의 소명을 따르고 있는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눈빛만 보면 된다. 소스를 섞고 있는 요리사, 첫 절개를 하는 외과의사, 서류를 작성하는 사무원, 모두 똑같이 몰입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의 존재를 잊고 동작에 몰두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대상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그 눈이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여가를 즐기며 산다. 요즘 우리는 여가를 ‘일하지 않을 때 하는 휴식’ 정도로 생각하지만, 전통적으로 여가는 그렇게 정의되지 않았다. 고대인들에게 여가는, 우리가 내면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정신 상태를 의미했다. ‘학교(school)’라는 단어도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 ‘스콜레(schole)’에서 유래한 것이다. 학교란 원래 지식을 열정적으로 탐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회고록에서 글쓰기를 ‘일’로, 달리기를 ‘휴식’으로 나누지 않았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된 여가이다. 반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그림 그리기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탐구하고, 노력하고 있으며, 온 마음으로 이 일에 몰입해 있다.”

여가를 즐기는 사람은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은 사람’과는 정반대이다. 외적인 과시가 아니라,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추진력으로 움직인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때, 성장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힘겨운 노동조차도 마치 자신의 본성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끊임없이 채소를 써는 요리사,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는 벽돌공처럼. 사람은 그렇게 자신만의 리듬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평범하고 단조로운 동작이라도, 충분히 오래 계속하다 보면 사색이 되고, 명상이 된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당신의 자연스러운 방식이 된다. 미켈란젤로도 한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손에 끌을 쥐고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제자리를 찾는다”라고.

노력 그 자체가 보상이다. 산악인들은 산 정상에 오르는 가장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험난한 길을 선택한다. 도전, 성장, 그리고 그 힘겨운 노력의 결실 자체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예전에 펜실베이니아 중부의 식료품점에 갔다가, 선반 위의 모든 병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누군가가 단지 ‘제대로 하고 싶어서’ 약간 수고를 들인 것이다. 그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일상의 탁월함 때문에 더욱 빛난다는 것을. 계산대를 부드럽고 명랑하게 지나는 사람, 호텔 프론트에서 기분 좋게 손님을 맞는 사람처럼 말이다.

어떤 거대한 프로젝트에 몰입할 때, 고통을 대하는 태도도 바뀐다. 무라카미는 분명히 고통을 견디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과 만족을 느끼게 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허나 고통을 맞이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문득 ‘아, 너무 아프다. 더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자. 이 고통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걸 더 견딜 수 있을지는 결국 달리는 사람 자신에게 달렸다. 이것이 마라톤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다.” 수십 년 전 빅터 프랭클도 말했다. 사람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견디는 능력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201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운동선수와 일반인의 고통 역치(즉,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지점)는 같지만, 운동선수는 고통을 견디는 능력, 즉 ‘통증을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가’가 더 높다고 한다. 이 고통 인내력은 반복적인 훈련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길러진다. 고통을 겪고, 한계를 마주하고, 그 벽을 넘는 것말이다. 무라카미는 다른 사람을 이기는 데 큰 흥미를 느끼지는 않지만, 자기 자신과 붙는 경쟁에는 늘 동기부여를 느낀다고 한다.

니체의 유명한 말이 있다. “삶의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떤 과정도 견뎌낼 수 있다.” 당신이 진심으로 사로잡힌 열망이 있다면, 좌절도 견딜 수 있고, 따라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가장 극심한 도전을 견디고, 가장 강렬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대부분은 어마어마한 의지나 자제력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들이 충분히 강했다면, 다이어트는 모두 성공하고 새해 결심은 매년 실현되었겠지.) 우리가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는 것은, 대개 그것보다 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이다. ‘내 아이를 사랑하니까, 담배를 끊는다.’ ‘내 나라를 사랑하니까, 해병대 훈련을 견딘다.’

자제력은 종종 더 큰 열망을 이용해 더 작은 욕망을 이기는 기술이다. 한 번 아이를 사랑하거나, 나라를 사랑하거나, 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거대한 가능성에 헌신하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고통을 피하고 싶다’ 같은 사소한 유혹이나 욕망은 그리 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무라카미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자질로 재능, 집중력, 인내심을 꼽는다. 소설 쓰기나 교향곡 작곡처럼 영감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이 순서가 맞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직업에서는 맷집, 곧 버티는 힘이 가장 중요하다.

레이 크록은 수십 년 동안 종이컵, 부동산, 밀크셰이크 기계 판매, 피아노 연주 등 온갖 일을 시도했다. 그러다 50대가 되어서야 맥도날드라는 식당 이야기를 듣고는, 미국을 반 바퀴 돌아가 그 성장을 크게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집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에서 끈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재능도 안 된다. 재능 있는 실패자들은 세상에 넘친다. 천재성도 안 된다. 보상받지 못한 천재는 거의 속담처럼 널렸다. 교육도 안 된다. 세상엔 잘 배운 폐인이 너무 많다. 끈기와 결단력만이 정답이다.” 물론 과장이긴 하지만,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직장에서 가장 좋은 동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이걸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끈기는 오직 말도 안 될 만큼 꾸준한 열망에서 나온다. 무라카미가 회고록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은, 그가 50대에도 여전히 마라톤을 뛰는 장면이다. 그는 더 열심히 훈련하고 있지만 기록은 점점 느려지고, 다리는 쥐가 나기 일쑤고, 경주는 고통스럽고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그는 인생에 달리기가 있어 다행이라고, 죽을 때까지 계속 달리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때때로 엄청난 재능을 가진 신예가 등장하면 감탄한다. 하지만 늙은 베테랑이 갖고 있는 생존 기술과 집요함, 그리고 여전히 경기장에 남아 있다는 그 사실은 또 다른 깊은 감동을 준다. 무라카미는 지금 76세이고, 아마 오늘도 여전히 달리고 있을 것이다.

이 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사람들이 왜 스스로 고통을 택하는가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이유도 있다. 바로 점점 더 강하게 느끼게 되는 어떤 확신, 이렇게 고된 삶이야말로 가장 좋은 삶이라는 감각 때문이다. 미국인 절반이 그러하듯, 나도 이번 주에 넷플릭스에서 〈Adolescence〉(사춘기)라는 쇼를 보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소셜 미디어 시대의 10대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쇼를 보고 나면, “죽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는 낭만적인 생각은 사라진다. 어떤 상처는 그저 인생을 되돌릴 수 없이 망치기도 하니까.

당신은 이런 아이들에게 다가가 짐을 덜어주고, 스트레스를 줄이고, 모든 것을 좀 더 쉽게 만들어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역설적으로, 인생은 어려움을 피하려 하기보다 맞서려 할 때 오히려 더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 때, 삶을 하나의 방향으로 집중시켜 중요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훨씬 더 평온하다. 인간은 원래 여정을 떠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고, 그 여정 가운데서는 종종 스트레스가 오히려 더 큰 만족으로 이어지곤 한다. 적어도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심리학자 캐롤 드웩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노력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중 하나다. 노력한다는 건, 무언가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뜻이다.”

이 모든 수고는 사실 마라톤이나 신문 기사나 잘 정돈된 마트 진열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인간으로 자신을 조금씩 단련하고 빚어내기 위한 것이다. 도전 속에서 자신을 확장하고, 훈련을 통해 자신을 단단히 다듬으며, 이해력과 역량, 그리고 품격을 키워가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성취는, 결국 그 치열한 여정 끝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이다.

자존감 운동은 실패했다. 그 운동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다독이는 말로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무언가를 이루고, 무언가를 배우고, 어떤 기준에 스스로 도달하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무라카미는 회고록 마지막에서 자신의 묘비에 작가이자 달리기꾼이라고 적히길 바란다며, 다음 한마디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적어도 그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물론, 피상적으로 보면 우리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축 위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열정과 무기력 사이에 있는 축 위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진화든 신이든, 혹은 둘 다든, 인간 안에는 탐험하고, 만들고, 더 나아지려는 원초적 충동을 심어놓았다. 하지만 인생은, 그저 생존을 위한 본능을 넘어, 어떤 유용함을 초월한 대상에 헌신할 때 가장 숭고해진다.

우리는 사람이나 소명, 프로젝트와 사랑에 빠지고 싶어한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며, 무관심이야말로 인간이 견디기 가장 괴로운 상태이다. 물론 삶에서 이룬 번영을 누리며 편안함만을 추구할 자격이 생긴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은퇴한 사람들조차도 마찬가지이다.

몇 달 전, 나는 100세 노인과 함께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요즘 읽고 있는 책과 참석한 강연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의 삶에서 지위나 성욕 같은 많은 욕망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우고 싶어했고, 이해하고 성장하고 싶어했다.

우리는 우리 삶이 드라마이길 원한다. 그리고 드라마의 본질은, 한 사람이 거대한 장애물에 맞서기 위해 불타는 욕망을 품고, 그 장애물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어떤 인물이든, 현실이든 극 중이든, 그를 이해하고 싶다면 이렇게 물어보시라: “이 사람이 기꺼이 견디려는 고통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의사, 사제, 경찰 같은 길을 선택한다. 그 길은 고통스럽지만, 그 싸움 속에서 우리는 적어도 행동하고 있고, 실력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는 티라노사우루스에게 염소를 먹이로 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샘 닐이 연기한 캐릭터가 중요한 말을 던진다. “티라노는 먹이를 받길 원하지 않아. 사냥하길 원하지.”

나도 누군가가 글쓰는 고통을 내 삶에서 빼앗아간다면 싫을 것이다. 대부분의 마라토너도 마지막 몇 킬로미터의 고통을 없애버린다면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싫어할 거라고 본다. 우리의 친구 도파민은 항상 앞으로 달려나가며, 항상 긍정적인 보상을 기대하고, 항상 저 언덕 너머에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감각을 준다. 그런 인간의 불안정함 속에는 축복이 깃들어 있다.

사람들은 이런 매혹된 상태를 이야기할 때 종종 멜로드라마처럼 과장되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틀린 건 아니다. 조각가 헨리 무어는 좀 과장되긴 했지만, 핵심을 꿰뚫는 말을 남겼다: “삶의 비밀은 ‘과업’을 갖는 데 있다. 하루하루, 매순간, 인생 전체를 다 바쳐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 그건 당신이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