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을 위한 약속
이번 학기에 강의하는 과목의 소개 페이지에 아래와 같은 문구를 추가했다.
몰입을 위한 약속
모두가 몰입하는 강의를 위해 모든 전자기기(노트북, 타블릿, 핸드폰)는 책상위에 올려놓지 않기로 합시다. 수업 중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것이 끼치는 악영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수업에 집중하는데도 큰 방해가 됩니다. 모두가 각자 따로 모니터를 보기 보다는 함께 같은 곳을 보며 왁자지껄 난상토론하는 수업이 되길 바랍니다. 필요한 자료는 이 저장소에 있으니 원한다면 미리 인쇄를 해서 오세요.
오랜 생각이었는데, 지난 방학 때 주위 사람들이 불을 붙여주었다. 학부 교수님들에게 이 생각과 필요성을 공유했더니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다. 몇 분들은 이번 학기부터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운영하고 계신다고 한다.
우리 학부의 이러한 움직임이 소문이 났는지, 카이스트 신문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이참에 학교 전체에 널리 화두를 던져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쁘게 응했다. 해당 기사가 최근 실렸다. 기자님이 “기술은 항상 이로운가?” 라는 제목을 붙여주었는데, 아주 딱 맞는 제목이다.
지면 제한상 담지 못한 인터뷰 전문을 아래에 싣는다. 기사에는 생략된 인용 자료와 세세한 경험이 담겨있다.
먼저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전산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허기홍입니다. 이번 학기에는 <프로그램논증>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프로그램논증>
이번 학기부터 수업에서 전자기기 사용을 제한하기로 결정하신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생들에게 제대로 몰입하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더구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말이지요.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에 골몰할 때 피어나는 에너지는 엄청납니다. 밴드의 연주가 합이 맞을 때, 축구장의 응원 소리가 공명할 때를 생각해보시면 될겁니다.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지요. 수업에서도 전자기기로 분산되던 에너지를 한데 모아보고 싶어서 이런 결정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한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만 최근에 방아쇠가 당겨졌습니다. 저희 연구실 학생과 우리 학부 동료 교수님을 통해서 접한 한 연구 논문 때문입니다 1. 수업시간에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히) 사용자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변 학생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였습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화면, 타자치는 소리가 주변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죠. 마치 간접 흡연 같더라고요. 더 알아보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펜실베니아 대학의 한 교수님이 쓰신 경험담도 우연히 접했습니다 2. 단순히 전자기기 사용을 제한하는 것 만으로도 수업 분위기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결심이 굳어졌지요. 나만 알지 말고 널리 퍼트려야겠다 싶어서 주위 여러 교수님들께 공유했습니다. 공감하시는 여러 교수님들께서 이번 학기부터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학생들의 전자기기 사용으로 인해 직접 목격하신 문제점들이 있으셨나요? 구체적인 사례를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노트북 같은 전자기기를 켜놓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제대로 집중을 못하는 상황은 아주 흔하죠. 화면을 보고 타자를 치며 씽긋이 미소짓는 학생들은 수업을 하다보면 자주 보입니다. 제가 만든 강의 자료가 그렇게 재미있을리가 없다는 건 제가 잘 아는데 말입니다. 저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데요. 예를 들어 “여기서 x의 값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상황에서 가능한 해결책은 뭐가 있을까요?” 같은 것들입니다. 대답이 어려울 때는 간혹 있지만 질문 자체는 쉬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간혹 돌아오는 대답이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아, 제가 질문을 잘 이해 못했습니다.” 주로 전자기기를 들여다보는 학생들이 그런 경우가 많았지요.
전자기기 사용을 제한한 후 수업 분위기나 학생들의 참여도에 변화를 느끼셨나요? 특히, 교수님께 질문하는 학생들이 더 많아졌는지 궁금합니다.
변화를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눈빛이 날카롭습니다. 제가 하는 수업은 전통적인 강의 중심 수업입니다. 하지만 단순, 일방적인 강의가 되지 않게끔 학생들과 소통을 많이 하는 편인데요. 질문과 답변의 수준이 예년에 비해 확실히 높습니다. 몇 년동안 쓰던 강의자료에서 틀린 부분을 집어 내는 학생도 있었고요. 예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학생들과 소통을 해도, 학생들의 이해도가 높아서 수업 진도가 더 빨라졌습니다.
보내주신 기사에서는 이 정책의 장점으로 필기가 학생들의 이해를 돕는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필기를 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네. 많은 학생들이 필기를 하면서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반대 의견이나 불편함을 표현한 학생들이 있었나요? 현재 학생들은 이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적응 과정은 어떠했나요?
반응이라고 할 게 없습니다.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학생도 없었고요. 첫시간에 제가 취지를 설명했고 모두들 고맙게도 잘 따라주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딱히 새로운 것은 없잖아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칠판 보면서, 선생님 눈 보면서, 공책에 써가면서 공부했듯이. 그냥 하던대로 하는 거니까 불편한 것은 없지요.
수업 중 전자기기 사용 제한을 어떤 방식으로 시행하고 계신가요?
책상 위에는 전자기기를 올려 놓지 말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수업을 위해 추가적인 준비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예시가 있나요? 긴급상황이나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대한 예외 규정이 있나요?
추가 준비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늘 하던대로 하는 것이지요. 제 강의 자료는 다 공개되어 있으니 원하는 학생은 인쇄를 해와도 되고요. 특별한 사유나 긴급 상황이라는게 어떤게 있을까요? 영화관이나 콘서트장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그런 장소에서는 모두의 몰입을 위해 핸드폰을 켜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우리 사회가 합의했죠. 그런데 공연 중에 긴급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나요?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가서 일을 처리하면 되지요. 이러한 것은 수업시간 전자기기 제한과 상관없이 늘 있는 일이라서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전자기기를 교육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순기능도 있을 것인데, 이러한 부분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전자기기를 활용해서 하는 수업이라면 당연히 순기능을 잘 활용해야지요. 하지만 제 수업은 강의식 수업이라서 전자기기가 도움이 되는 경우는 떠올리기가 어렵습니다. 저도 과거에 수업을 들을 때나 학회 발표를 들을 때 도움이 될까하여 노트북을 가지고 가본 적이 있는데요. 늘 도움이 안되는 것을 깨닫고는 그 뒤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뇌가 멀티태스킹에 약하다는 것은 많은 뇌과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현대에 들어 아무리 전자기기에 익숙해진 우리라고 해도, 수백만년을 흘러온 물길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으니까요.
이 정책을 다른 수업이나 다른 교수님들께도 권하고 싶으신가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네. 종이를 뚫을 것 같은 학생들의 눈빛을 마주하는 수업이 매우 즐겁습니다. 맞닿는 시선을 가로막는 전자기기를 걷어내니 더 깊은 이해로 빠져듭니다. 모든 교수님들께 권합니다.
앞으로도 이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실 계획인가요?
네.
마지막으로 교수님의 정책에 대해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가요?
정책이라고까지 말하기에는 너무 거창합니다. 대신 제 수업에서는 “몰입을 위한 약속”이라고 부릅니다. 전자기기 바깥, 현실의 무언가에 한 번 몰입해 보시죠. 그리고 주위에 비슷한 몰입을 하는 사람들과 공명해 보시죠. 무언가 느껴질겁니다. 전기줄과 전자기파를 통해서는 전달되지 않는 무언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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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a et al., Laptop multitasking hinders classroom learning for both users and nearby peers, Computers & Education,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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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ytimes.com/2025/08/21/opinion/mobile-phones-college-classrooms.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