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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학생들, 특히 학부생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이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진로를 설계 할지 걱정이에요.”

늘 난감했다. 무언가 조언을 해주고 싶은데 번뜩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는 이제껏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학부 지도학생과 만남을 준비하면서 미리 상의하고 싶은 질문을 조사했더니 어김없이 많은 학생이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적어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만은, 그 흔들리는 꽃에 약간의 거름이라도 될까하여 이 참에 생각을 정리해볼까 한다.

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가? 어떤 일을 직접 해보기전에 그 일이 내 천직임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현재까지 관찰한 정보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미래를 예측해 볼 뿐이다. 그때 나는 어떻게 했었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래 세 가지가 컸던 것 같다.

  • 작은 즐거움에 귀 기울이기
  • 싫다고 크게 외치기
  • 자신있게 저지르기

1. 작은 즐거움에 귀 기울이기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당신. 혹시 무언가 거창한 것이, 한 번에 마음 깊숙이 꽂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 너무 큰 기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적어도 내가 본 세상에서 그런건 없었다. 대학교 교수가 내 일생을 바칠 천직임을 뇌리에 한 방에 박히게 할만큼 큰 사건은 없었다. 단지 순간 순간 느낀 작은 즐거움을 빵 부스러기 주워 먹듯이 따라오다가 도착한 곳이 여기였을 뿐이다. 생각해보자. 내 삶을 통틀어 행복했던 순간에 있던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을 따라 가보면 어떤 곳이 나올까?

내가 즐거웠던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정성들여 내 이름을 건 작품을 만들던 때가 떠오른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나는 레고를 아주 좋아했다. 널부러져있는 조각들을 혼자 힘으로 하나하나 조립해서 최종본을 만들 때 느낀 즐거움이 시작이었다. 10대가 되고 컴퓨터를 만지면서 부터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내 힘으로 만든 첫 프로그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비주얼 베이직으로 작성한 폴의얼굴.exe 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마우스로 버튼을 누르면 철권이라는 게임의 캐릭터인 폴의 얼굴이 화면에 뜨는 간단한 프로그램이었다. 명령어의 의미도 모른채 책만 보고 몇날 며칠에 걸쳐 만든 프로그램이다. 내 계속된 자랑에도 친구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 힘으로 해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20대에는 음악을 만드는데 잠시 빠져있었다. 다행히 별로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닫고 그만 두었지만, 혼자 힘으로 악보를 만들고 녹음을 하느라고 새벽을 맞이한 적도 많았다. 30대에 들어설 때 쯤에는 술을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장독을 하나 사서 책을 찾아보며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작품에 비하면 맛이 그리 신통치는 않았지만, 내 정성이 깃든 맛을 나는 즐길 수 있다. 연구를 하는 것도 이러한 연장선이다. 내가 찾은 문제, 공을 들여 만든 해결 방법과 프로그램 모든 것에 내 정성과 사연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내 이름을 건 논문이 출판될 때면 그래서 너무나 즐겁다. 학계는 이런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자기 자랑할 수 있는 자리 (학회) 도 마련해준다. 이 중독성은 끊기가 어렵다.

두번째 요인은 단순히 대학이라는 공간이 주는 즐거움이었다. 괴로웠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한다. 세상이 흑백 텔레비전에서 컬러 텔레비전으로 바뀐것 같은 신선함이었다. 넓은 캠퍼스를 가득 메운 젊음과 열정을 느끼는 즐거움은 4학년이 되어도 전혀 사그라들지를 않았다.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평생 캠퍼스에 지박령처럼 눌러 앉을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된건 그 때부터이다. 아하. 캠퍼스 지박령이 되려면, 교수가 되면 되겠구나. 교수가 되려면 대학원에 가야되는 구나. 그렇게 아무런 고민 없이 대학원 원서를 써냈다.

지박령이 되는 여러 경로 중 프로그래밍언어라는 분야를 택한 것도 즐거웠던 기억의 부스러기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 대학원생들이 그럴테지만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과목이 영향을 많이 끼친다. 대학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과목이 프로그래밍 언어와 컴파일러였다. 특히 다른 과목에 비해 이 과목의 숙제를 하고 있노라면 20년 전 레고만들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이 즐거웠다. 명령을 하나하나 재귀적으로 조립하여 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그랬다. 그 아무리 재미있는 MT나, 그 아무리 중요한 시험 전날이어도 도저히 밤을 새지 못하는 내가 호기심에 밤을 지샜던 순간이 몇번 있었다. 당연히 큰 고민 없이 그 길로 향했다.

이렇듯 즐거움의 조각들을 모으고 모으다 보면 공통점이 보이고, 여러 선택지의 답이 자연스레 정해질 것이라 믿는다. 나는 일관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지금 내가 즐거워 하는 것들, 즉 멋진 캠퍼스로 매일 출근하고, 내 이름을 건 논문을 출판하고 강의를 개설하고 대학원생을 배출하는 것들은 돌이켜보면 그 옛날의 즐거움과 일맥상통한다. 단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다른 형태로 발현된 것일 뿐이다. 여기까지 오는 선택을 하면서 대단한 계시를 받은 적은 없다. 이 일 아니면 내 인생이 의미 없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선택을 하는데 이유가 거창할 필요는 없다. 작지만 마음이 진정으로 동하는 즐거움을 나열해보고 그 교점에 있는 미래를 그려보기를 권한다.

2. 싫다고 크게 외치기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당신. 그러면 혹시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하다. 딱히 좋은 선택지가 없다면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방법도 좋은 전략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외우기를 지독히 싫어했다. 이른바 암기과목은 늘 전체 성적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나같이 암기를 싫어하는 귀차니스트들은 핵심 원리 몇 개만 파악하여 무한히 많은 현상을 해석하는 게으름을 즐긴다. 따라서, 수학과 과학은 내게 보석같은 과목이었다. 과학중에서도 생물과 지구과학은 조금 정이 덜가고 물리나 화학이 제격이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최대한 암기가 필요없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므로, 문과 이과 중에서 문과는 탈락. 이과 중에서도 의학 계열은 탈락. 직업도 무언가를 외워서 입사 시험보는 방향은 탈락. 그렇게 공학 계열, 연구 직군이 남았다.

외우기를 싫어하는 까닭에 기억력으로 승부하기 보다는 꾸준히 쌓아올린 결과물로 결판 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대표적으로 프로그래밍이 그랬다. 단기간에 지식을 외워서 맞히는 것은 별로 자신이 없다. 반면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이 시행착오를 겪어서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승부는 즐긴다. 아무것도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된다. 집중하고 시간을 투자하면 자연스레 원리가 머리속에 들어온다. 잠시 딴 짓하다가 와도 걱정이 없다. 내 기억은 날아 갔을 지언정, 내 프로그램 코드는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그동안 내가 외운것을 까먹었을까 다시 기억력 테스트를 하는 불안함이 없다. 연구와 논문도 마찬가지이다. 고시는 한 번 떨어지고 재수를 할때 그간 외운 많은 것들이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 해에 60점을 받고 떨어졌다고 하여, 재도전시 60점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0점부터 재시작이다. 반면, 학계에서 논문이 비록 채택되지 않더라도, 떨어진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재도전할 수 있다. 모든 연구 결과가 거기 그대로 있다. 그렇게 연구하는 길로 자연스레 이끌렸다.

많은 경우 긍정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 부정적인 것을 회피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재미있는 일이 전혀 없어도 세상은 살만하지만, 손톱밑에 가시가 박힌채로 사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 본인에게는 어떠한 가시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이를 피하는 미래를 그려보기를 권한다.

3. 자신있게 저지르기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당신. 혹시 고민이 될 만한 몇 가지 선택지는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크게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몇 개 있다면, 아무거나 빨리 선택해서 한번 직접 경험해보는 것도 좋은 전략일 수도 있다.

점심으로 짜장면과 짬뽕이 둘다 먹고 싶지만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내 전략은 늘 이렇다. 길게 고민하지 말고 아무거나 주문해서 빨리 먹고 배고픈 시간 최소화 하기. 어차피 짜장면 먹고 나면 별로 짬뽕 생각 안날 것이다. 만약 여전히 짬뽕이 먹고 싶다면? 저녁에 먹으면 된다. 인생은 길다.

박사 학위를 마칠 때 쯤, 회사로 갈것인가 대학 연구원으로 갈것인가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어디로 가든지 나중에는 대학교에 교수로 가고 싶었지만 중간 과정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대학 연구원으로 간다면 온전히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새로운 팀에 가서 적응해야하고,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 연구원이라는 단점도 있다. 반면, 당시 고려하던 회사와는 몇 달간 같이 일을 해오던 참이었다. 큰 회사에 정직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안정적이기도 했고, 연구를 장려하는 분위기도 있어서 향후 학계로 가는데 큰 걸림돌은 아닐 수도 있었다. 만일 대학교에 자리를 잡지 못할 경우 그 회사에서 오래 경력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회사는 회사라 개인의 연구보다는 전체 집단의 이익이 향하는 곳으로 가야할 것이라 예상했다. 며칠 고민하고 대학 연구원으로 가는 것으로 정했다. 어디든 가보기 전까지는 어떨지 모를 것이라 더 오랜 고민은 소화불량만 부를 것이라 보았다. 어디를 가든 내가 잘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고 대학 연구원을 해보다가 정 불편하면 그때 회사로 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훌쩍 떠나고 난 이후에는, 일에 몰두하느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그 이후에 내가 원하는 일이 잘 풀려서 지금까지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만, 그 당시에 계획대로 안되었더라도 크게 내 인생이 아작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본다. 또 어딘가에서 다른 즐거움을 찾으며 살고 있었을 테니까.

비슷한 선택지 앞에서 길게 고민하기 보다는 아무 선택지나 고른 후 아낀 시간을 성장에 쓰는게 나을 때가 있다. 그 시간을 정말 알차게 썼다면, 설사 그 선택이 잘 안풀렸을지라도 다음 기회가 꼭 다시 올 것이라 믿는다. 늘 완벽한 선택을 하려고 기를 쓰지말고 가끔은 운에 맡겨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다만 주사위를 던진 이후에는 꼭 가열차게 뛰어서 아낀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권한다.

4. 마무리

내 단편적인 경험이 진리가 될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한 가지 사례 연구로는 괜찮지 않을까 하여 풀어보았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을 바란다. 또한 더 경륜이 있는 분의 이야기도 많이 들어보길 권한다.

많은 경우 답은 이미 내 안에 있는게 아닌가 한다. 다만, 너무 어깨에 힘들어간 나머지 펀치가 안나가는게 아닐까? 생각은 깊게, 고민은 짧게, 선택은 자연스럽게, 노력은 가열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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