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and My Ph.D
“당신의 지원 동기는 무엇입니까?”
자기소개서와 면접에서 좀처럼 빠지지 않는 질문이다. 지원자는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의 바람을 상대가 듣고 싶어 할 말로 옮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은 성장의 의지가 되고, 좋은 경력을 쌓고 싶다는 기대는 조직에 기여하겠다는 포부가 된다. 거짓은 아니지만, 속마음을 그대로 옮긴 말도 아니다. 지원자도 면접관도 그쯤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지원 동기를 쓰는 일이 어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기는 제법 분명한데, 그대로 적자니 속물처럼 보일 것 같다. 명문대에서는 좋은 교수에게 배우고 뛰어난 동료와 공부하며, 사회가 인정하는 학벌도 얻는다. 대기업에서는 경력을 쌓고 높은 급여와 복지를 누리며 안정된 생활을 기대할 수 있다.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다만 지원서에 적기에는 어딘가 모자라게 느껴진다.
“다 알면서 왜 물어보지?”
지원 동기를 쓰다 보면 한 번쯤 하게 되는 생각이다. 그런데 상대가 듣고 싶어 할 답을 걷어 낸 뒤에도 내 답이 분명하게 남을지는 모르겠다. 좋은 학벌과 직장, 안정된 생활을 원한다는 말은 익숙하다. 그것들이 왜 내게 중요한지까지 묻는 일은 드물다.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더 나은 것을 고르는 데 익숙해지면, 무엇을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가늠하고 있었는지는 잊기 쉽다.
그렇다면 대학원은 어떨까.
대학원, 특히 박사 과정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합격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앞으로 얻을 것을 그려 보기 어렵다. 높은 급여가 약속되지 않고, 졸업 후 원하는 직장을 얻는다는 보장도 없다. 전문성이 깊어지는 만큼 진로의 폭은 좁아지고, 그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곳이 적다면 취업은 더 어려워진다. 연구 경험은 쌓이지만, 회사에서 얻는 실무 경험과는 성격이 다르다. 같은 시간에 다른 길을 택했다면 쌓였을 경력과 소득까지 셈하면 계산은 한층 복잡해진다.
얻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은 분명한데, 돌아올 보상이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학위 과정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결과도 크게 달라진다. 입학은 시작일 뿐이고, 그 끝에서 어디에 도달할지는 알 수 없다. 손익만 따진다면 선뜻 택하기 어려운 길이다. 게다가 손익을 따지려면 무엇을 이익으로 셀지부터 정해야 한다. 소득과 안정, 그리고 궁금한 문제를 오래 붙들 수 있는 시간. 이 가운데 무엇에 더 무게를 둘지는 계산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박사 과정 지원자에게 지원 동기는 무게가 다른 질문이다. 공부를 잘해 왔으니까, 주변에서 권하니까, 당장 다른 선택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카이스트에서는 주위를 따라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런 이유로 시작할 수는 있다. 다만 몇 년을 보내야 하는 길인 만큼, 남보다 먼저 자신에게 그 선택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내적 동기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지도교수와 연구실 동료, 학업을 이어 갈 수 있는 현실적인 여건도 중요하다. 다만 그것들이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까지 대신 답해 주지는 않는다. 보상이 불확실할수록,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
박사 과정의 지원 동기는 면접관이나 교수보다 먼저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거창하거나 고상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입학을 앞둔 지금의 나에게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2~3년 뒤,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를 나에게도 납득할 만한 이유여야 한다. 처음의 기대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을 이유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입학 전에 평생 바뀌지 않을 답을 마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이유를 돌아보고 달라진 나에게 다시 묻는 일까지가 그 선택의 일부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 역시 처음부터 뚜렷한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점이 조금 잘 나온다는 이유로 공부를 더 해 보고 싶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학위 과정의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내 생각을 논리로 풀어내고 데이터로 뒷받침하는 연구라는 활동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취업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었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 퇴근 후의 여가, 주말에 친구를 만나 카페와 맛집을 찾아가는 일상. 내가 그리던 직장 생활은 그런 모습이었다. 일 밖에서도 내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다는 점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도 나는 왜 박사 과정에 진학했을까. 그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석사 과정에 입학한 지 1년쯤 지났을 때였다. 당시 나는 LLM의 지식을 추출해 확률 문법 모델에 옮기는 Synstiller 연구를 하고 있었다. 확률 문법 모델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문법 규칙에 확률을 부여하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그램의 구문 트리(Abstract Syntax Tree)를 생성하는 모델이다. 목표는 LLM 수준으로 코드를 생성하면서도 CPU만으로 실행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었다.
목표는 분명했지만, 당시 내 지식과 역량으로는 원하는 성능에 이르지 못했다. 인턴 기간을 포함해 1년 반을 매달렸는데,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었다. 원래는 석사 첫해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내면 박사 과정에 진학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준을 채우지 못한 채, 박사 과정 지원 서류를 내기까지 6개월이 남아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성과가 진학 여부를 대신 결정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것을 연구에 소질이 있다는 증거로 삼아, 계속해도 된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성과는 연구가 얼마나 잘되었는지를 알려 줄 뿐,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미뤄 두었던 질문만 남았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1년 반 동안 성과가 없었는데, 그래도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
답하려면 내가 연구에서 무엇을 바라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연구 자체를 하고 싶은 것인지, 연구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고 싶은 것인지. 좋은 직장과 여유 있는 생활이 가장 중요했다면, 석사를 마치고 취업하는 편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연구를 여기서 그만둔 내가 그 생활에 만족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그리던 삶은 정말 내가 원하는 모습이었을까. 남들이 좋다고 하니 나도 원한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물론 남들이 원하는 삶이라고 해서 내게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 바람 역시 주변 사람들과 살아오며 생겨났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바람의 출처보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내가 그것을 원하는지였다. 안정된 생활을 택하든 연구를 계속하든, 그 이유를 남들의 평가에만 맡길 수는 없었다.
오래 고민한 끝에, 내게는 생활의 여유만큼이나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좋아하는 학문을 연구하고, 그 일에 몰두하며 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을 접고 얻은 안정된 생활에는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성과가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연구를 그만두기에는 아직 이른 셈이었다.
나는 삶이 지칠 때면 허준이 교수님의 2022년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다시 본다. 그때마다 위로를 받는데, 특히 이 구절에 오래 마음이 머문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들으며,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느라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뒤로 미루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학위를 받고 좋은 직장을 얻는 일이 남에게 보여 줄 만한 삶의 조건은 될 수 있어도, 그것만으로 내가 원하는 삶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좇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은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원하는 삶을 시작하기 위해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목표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목표를 하나의 점으로 설정한다. 입학이나 졸업, 취업처럼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성취를 삶의 앞쪽에 찍어 둔다. 그러나 그 점을 스쳐 지나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삶은 그 뒤에도 계속된다. 성취가 이정표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전후의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지까지 정해 주지는 못한다. 다음 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산다면, 삶의 대부분은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한 시간으로 남는다.
그래서 내게는 어느 점에 도달할 것인가만큼이나 어떤 궤적을 그리며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어떤 일에 시간을 쓰며, 그 선택들을 어느 방향으로 이어 갈 것인가. 그 방향을 정하는 가치관이 있어야 성취의 순간뿐 아니라 그 사이의 날들까지 내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박사 과정은 학위라는 목표에 이르기 위한 준비 기간이 아니다. 궁금한 문제를 붙들고, 생각을 고치고, 근거를 찾아가는 연구의 과정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성과를 내고 싶지만, 성과가 나오는 날에만 그 시간의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연구하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내가 원하는 삶의 궤적을 이루고 있다.
삶에는 미리 정해진 이유가 없고, 각자가 살아가며 그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막막한 일이다. 남들이 인정하는 성취를 얻더라도 그것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여전히 내가 답해야 한다. 동시에 정해진 답이 없기에, 내게 중요한 것을 삶의 이유로 삼을 여지도 있다. 그 이유가 누구에게나 옳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을 택하며 감수할 몫까지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박사 과정에 진학한다고 해서 삶의 이유를 한 번에 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연구가 언제까지나 같은 의미로 남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나는 앞으로도 이 선택을 돌아보고, 계속할 이유를 새로 묻게 될 것이다. 지금의 내게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이해하고 싶고, 내 생각을 근거로 설명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그 마음에 내 시간을 쓰기로 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나의 지원 동기는 단순하다. 나는 연구가 좋고, 앞으로도 연구하며 살고 싶다. 박사 과정은 그 마음을 이어 가기 위해 택한 형식일 뿐이다. 언젠가 박사 과정이 끝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궁금한 것을 탐구하며 살고 싶다.